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반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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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을 앞두고 아직도 선거제도가 합의되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은 병립형으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민주당은 연동형 존치와 병립형 회귀를 두고 내부 갈등을 겪는 모양새다. 개인적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매우 반대한다. 단순히 정의당이 싫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비례성을 강화하는 것 자체가 나쁜 방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동형은 선거제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1. 직관적이지 않다.
소선거구제는 A후보가 표를 많이 받으면 A후보가 당선되고, A당 후보가 많이 당선되면 A당 의석이 늘어난다는 가장 직관적인 제도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하에서는 A당 후보가 1명 더 당선되면 A당 의석이 1석 늘어난다는 기초적인 직관이 성립하지 않는다. 완전 연동형이 아니라 준연동형이라면 그 난해함은 더 심해진다. 모든 유권자가 24시간 365일 내내 뉴스를 보면서 살 수는 없고, 민주주의에서는 상대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낮은 유권자들 역시 동등한 1표를 보장받아야 한다. 이들이 (준)연동형의 비직관적이고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
2. 방향만 바뀔 뿐 여전히 전략적 투표가 필요하다.
소선거구제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사표(死票)가 많이 발생하며, 이로 인해 유권자들이 전략적 투표를 강요받는다는 점이다. 가령 정의당 등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만 현실적으로 소선거구제 하에서 정의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없다면, 유권자가 '최악'인 국민의힘을 막기 위해 마지 못해 '차악'인 더불어민주당에 투표하는 '전략적 투표'를 강요받는다는 이야기다. 비례대표의 경우에는 (물론 봉쇄조항이라는 장벽이 있기는 하나) 이러한 전략적 투표의 필요성이 덜하다는 점이 일반적으로 장점으로 제시된다.
문제는 연동형은 이 '전략적 투표가 필요없다'는 비례대표제의 장점이 크게 퇴색되는 제도라는 점이다. 아까와는 반대로, 위성정당이 없다면 연동형 하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등 거대정당은 비례대표를 거의 얻기 어렵다. 그렇다면 '전략적 투표'로 성향이 비슷한 소수정당에 비례대표 투표를 하는 것이 '비슷한 진영'의 의석 증대를 위해서는 '합리적'인 행위이다. 소수정당에서 거대정당으로의 전략적 투표는 나쁘고 방향이 바뀐 전략적 투표는 좋은 일인가? 이런 식으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다당제 구도를 연동형 옹호자들의 주장대로 '민심 그대로'의 국회라고 볼 수 있는가?
3. 정당이 지역구에 신경쓸 동인을 크게 떨어뜨린다.
상술했다시피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지역구 1석을 더 얻는 것이 곧 당의 의석 1석을 늘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연동형 비례대표제 하에서 개별 지역구의 당락은 정당의 총의석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지역구 1석이 줄었다면 그만큼 비례대표 1석이 늘어서 '보상'을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 지역구 단위의 세세한 의제를 챙기는 소위 '지상전'의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고, 각 정당이 의석을 늘리기 위해서는 중앙정치 차원에서의 '공중전'만이 전부가 될 것이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의 시대에서 정당이 지역에 신경 쓸 동인을 더욱 떨어뜨리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가?
아마 연동형 비례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당제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유일한 해답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국회 의석을 늘리는 것은 여론의 강한 반발과 이에 영합한 국민의힘의 반대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지역구를 줄여서 그만큼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 역시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해 어렵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다당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준)연동형 말고는 답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인위적으로 다당제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1. 다당제=선이고 양당제=악이라는 도식 자체에 일단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의원내각제였다고 하면 다당제 하에서 집권을 위해서는 연정이 요구되므로 다당제 옹호론자들이 주장하는 효과를 어느 정도는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 내각제 개헌을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내가 아는 선에서는) 못 본 것 같다. 국회에서 과반을 얻는 것이 정권의 존망에 아무 영향을 주지 않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굳이 연정을 할 동인이 떨어지므로, 다당제는 여소야대를 만성화시키고, 이것은 협치보다는 비효율과 정쟁을 오히려 심화할 뿐이다. 당장 다당제 여소야대였던 20대 국회에서 '협치'가 이루어졌다고 누가 생각하나? 20대 국회는 내내 '일하지 않는 국회'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국회선진화법을 우회하기 위한 각종 꼼수와 이를 물리력을 써서라도 저지하려 드는 등의 극한 충돌만이 빚어질 뿐이었다.
2. ↑를 해결하려면 '과반을 얻는 것은 어렵되 일단 연합으로 과반을 만들면 할 수 있는 일이 많게' 하는 방법이 있다. 가령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합의가 아니라 전부 표결로 선출하게 하고, 직권상정 요건을 완화하는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당제 하자면서 이런 거 좋아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그냥 국회 내 다수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모두가 합의하는' 국회를 원하는 것이다. 말은 좋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일 같은 건 세상에 거의 없다. 모두가 동의하는 일만 하겠다는 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선거를 통해 다수당을 바꾸는 행위가 실질적인 정국 운영에 있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는 선거를 왜 해야 하며 대표자는 왜 유권자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
3. 애초에 현 시점 한국 정치지형은 선거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다당제가 정착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당의 친명-비명 갈등이 뭔가 이념적인 차이가 있어서 갈등하는 것인가? 친명계 핵심에는 김병욱(민/성남 분당 을)을 비롯해 보수적인 의원들이 상당수 끼여 있고, 반대로 최근 탈당한 이상민(무/대전 유성 을)은 차별금지법에 가장 전향적인 의원 중 하나였다. 지금 신당을 거론하는 비명계가 무슨 '민주당과 다른, 대변되어야 할 이념'을 갖고 있는가?
애초에 한국의 정치적 균열 자체가 정책적 지향보다는 역사관에 기반한다고 본다. 민주당은 경제적 좌파/사회적 진보를 축으로 모인 정당이 아니라 반독재 민주화 세력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기반으로 모인 정당에 가깝다. 반대쪽의 보수정당 역시 비슷하다. 역사관의 틀 하에서 정책 의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전부 나중의 문제로 밀릴 뿐이고, 설령 다당제가 정립된다 하더라도 각 당은 결국 역사관이라는 큰 균열축 하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을 것이다. 당장 20대 국회 당시 바른미래당은 결국에는 기존 국민의당/바른정당 거의 그대로 쪼개져서 도로 해체돼버렸다.
마지막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좀 지적하고 싶다. 국민의힘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여전히 결사반대하는 입장이고, 지금 거부권을 쥔 대통령은 윤석열이다. 민주당이 당론을 연동형 비례제+위성정당 금지로 정한다고 해도 통과까지 또 지난한 잡음을 거쳐야 하고 그러고 나면 다시 대통령의 거부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러면 결국 기존 선거법대로 선거를 치러야 하고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을 만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연동형론자들이 이걸 몰라서 하는 말이면 무식한 거고 알고도 하는 말이면 나쁜 거다. 민주당이 아니라 소수정당에 이득을 주는 연동형 비례대표제(통과될 리도 없는)를 위해서 민주당이 정치적 부담을 다 짊어진 다음에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으로 의석을 날먹하든 말든 그 후폭풍은 민주당이 알아서 처리하고 기왕이면 국민의힘에 대항하기 위해 '반윤연대' 분위기를 띄워서 소수정당에 '전략적 투표'로 민주당 찍을 사람들의 비례표를 나눠줘서 의석을 먹게 해줘라. 물론 그 분위기도 민주당이 만들어줘라. ...양심이 있나?
추가)
마지막 문단에 '도둑놈 심보'라는 다소 거친 표현을 쓰면서 연동형을 주장하는 제정파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해 보여 덧붙인다.
2019년의 선거제 개편은 사실 민주당이 원하는 공수처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기 위해 정의당 등과 '거래'를 한 성격도 강했는데, 현 시점에서 정의당 등은 '거래'라기보다도 그냥 민주당에게 일방적으로 연동형을 '요구'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2019년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면 정의당 윤소하 당시 의원이 "자유한국당이 제발 위성정당을 만들어 달라" 소리를 하는 등 이들이 위성정당 문제에 대해 안이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은 명확한데, 결과적으로 위성정당에 대한 여론이 나빴다고들 하지만 그 선거에서 투표한 유권자 70%는 양당의 위성정당에 표를 줬다. 민주당이 만약 위성정당을 안 만들었으면 윤소하 당시 의원의 주장대로 '위성정당 심판론'이 불거져 미래통합당이 더 폭망했을까? 그럴 리가.
본문에도 썼다시피 민주당이 위성정당 금지법을 만들고 싶다고 해도 국민의힘이 반대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쥐고 있는 이상 그걸 이번 총선에 적용시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사실상 연동형 고수 요구는 (위성정당의 위험이 있는) 현행 선거제를 유지한 채 총선을 치르라는 요구인데, 그렇다고 정의당 등에서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또 만드는 걸 용납할 리는 없다. 정의당 등이 원하고 민주당에는 아무 이득이 없는 연동형을 위해서 민주당이 정치적 부담은 다 짊어진 후에 다시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만든다 해도 민주당은 만들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는 게 지금 사실상 정의당 등의 요구인데 그 반대급부로 정의당 등이 제안하는 '대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현행 선거제 하에서 국민의힘이 위성정당을 만든다고 하면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만드는 선택지를 봉쇄하면 결국 본문에도 썼듯이 민주당 지지자들이 군소 진보정당으로 '전략적 투표'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고, 실제로 연동형을 주장하는 제정파는 대놓고 그래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즉 거부당할 게 뻔한 선거법 개정을 위한 정치적 부담을 민주당이 지고, 결국 선거법 개정이 좌초되고 국민의힘의 위성정당을 만들면 '(진보정당의) 표만큼의 의석'조차도 아니고 민주당이 받았어야 할 표를 소수 진보정당으로 '나눠줘서' 진보정당의 의석을 늘려달라는 게 현재 연동형을 주장하는 제정파의 요구인 셈이다. 이를 '도둑놈 심보'라는 말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