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혁신당'은 정의당을 대체할 수 있을까

라인란트 2024. 9. 18. 22:39

'조국신당'에서 '혁신당'으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출처: 한겨레)

총선 이전 신당 창당을 추진하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조국신당'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게 되자 차선책으로 '조국신당'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이름을 내세워 창당했다. 총선 기간 내내 '조국당', '조혁당' 등으로 불리는 것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던 조국혁신당은 총선 이후 '혁신당'을 정식 약칭으로 등록했다. 한때 '혁신'이라는 말은 오늘날 '진보'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했고, 비명계 정치인들이 '혁신계'를 자칭한 적도 있다. 조국 대표가 이런 것들까지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중요한 건 조국혁신당이 이제 '조국신당'이 아니라 '혁신'이라는 키워드로 스스로를 정의했다는 점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오진 않았지만 2심까지 유죄를 선고받은 조국 대표의 남은 정치생명은 길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국이 사라지더라도 조국혁신당의 이름으로 얻은 국회 의석 12개는 4년의 임기 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조국혁신당이 '혁신당'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언젠가 당 이름에서 '조국'을 떼야 할 날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국혁신당이 일회용 1인 떳다방 정당이 아니라 뭔가 제대로 된 독자적 정체성을 설정하고자 한다면 한국 정치에 있어서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체성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운동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스스로 '사회주의자'라 칭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더 선명한 개혁'을 늘 강조했던 조 대표의 평소 메시지를 고려하면 혁신당이 노리는 자리는 '민주당의 왼쪽 날개', 좀 더 구체적으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진보정당의 모습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정의당처럼') 내부총질을 하지 않고 필요할 때는 단일대오를 유지하는 우당, 나쁘게 말하면 민주당에 협조적인 2중대 말이다.

정의당은 국회에서 사라졌고, 원내 최대 진보정당인 진보당은 예전 정의당만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 비례위성정당에 빌붙지 않고도 자력으로 12석을 얻을 만큼 자생력이 있으며, 구 정의당 비례투표층을 상당부분 흡수했고, 대표는 선명한 진보개혁 정체성을 외치며, 금투세를 비롯해 민주당이 후퇴하는 의제에서 원칙론을 고수하는 혁신당이 새로운 진보정당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 대답은 'No'다.

신생 1인 정당을 지지할 이유

민주당사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흉상 (출처: 경향신문)

예컨대 더불어민주당은 무슨 당인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일단 '이재명의 당'은 정답이 아닐 것이다. 물론 민주당이 '이재명의 당'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 역시 민주당이 이재명의 당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비판을 하는 것이다. 비단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 외에도 민주당을 거쳐갔던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민주당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이 모여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민주당'의 정체성을 이루며,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은 그렇게 형성된 당의 정체성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재명에 반대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한다."라는 말은 충분히 가능한 진술이다.

반면 현 시점에서 조국혁신당은 '조국의 당'이라고밖에는 정의될 수 없다. 아무것도 증명한 바 없는 완전한 신생 정당을 지지할 근거는 오직 그 당을 이끄는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신뢰 뿐이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을 지지한다면 그것은 조국 대표, 조금 더 넓게 보면 조국혁신당을 이끄는 인물들을 신뢰하고 지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조국에 반대하지만 조국혁신당을 지지한다."라는 말은 뚱딴지 같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나는 이재명 대표가 최근 종부세·상속세 완화 등을 꺼내드는 것에 대해서 "민주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지켜봐온 역사적인 민주당의 모습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민주당에게 기대되는 방향성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정의당 정치인의 특정 행보를 두고도 "정의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할 수 있다. 반면 지금 시점에서 조국 대표의 정치행보를 두고 "조국혁신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신생 정당 조국혁신당에 있어서는 조 대표와 정치인들이 지금부터 제시하는 방향성이 곧 당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 정치인들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는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우)와 박은정 국회의원(좌) (출처: 뉴스1)

그렇다면 "조국혁신당을 '진보정당'으로서 지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곧 "조 대표 등을 '진보 정치인'으로서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연결된다. 조국 대표 본인부터 살펴보자. 조국 일가가 검찰 권력을 건드린 대가로 지은 죄보다 과한 대가를 치렀다? 일정 부분 사실일 것이다. 그 정도면 강남에 사는 부자들 다 하는 것이다? 역시 일정 부분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강남 부자들의 행태'를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통상적으로 민주/진보 진영이 취해오던 스탠스가 아니었는가? 조 대표를 옹호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행태가 사소한 문제조차 아니라는 투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비단 조국 본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비례대표 1번으로 공천받은 박은정 의원(당시 후보)의 남편이 전관예우로 거액의 수익을 벌어들였다는 의혹에 대해 박 의원은 그 정도면 전관예우도 아니라는 투의 태도를 보였고, 조국 대표 역시 박 의원을 옹호했다. 전술했다시피 이들은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들의 진정성을 판단할 근거는 그동안 살아온 삶의 궤적 뿐이다. 조국 대표 일가나 박은정 의원의 남편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라고 생각하기 위해선 일관성을 갖다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강남 부자'들의 유사한 행태 또한 긍정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진보에 대한 진정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물론 부패하거나 언행불일치를 하는 정치인은 민주당에도, 그리고 진보정당에도 적잖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술했다시피 조국혁신당을 지지할 근거는 조국과 조국이 영입한 사람들 뿐이기 때문에 이들의 진정성을 신뢰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당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국 없는 혁신당의 미래

 

그렇다면 22대 국회 활동을 통해 조국혁신당은 진보적 정체성에 대한 신용을 얻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는 학자 조국이 사회 진보에 대한 진정성을 지녔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국이 2016년에 당을 만들었다면 그 진보적 진정성에 공감해 투표할 이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조국혁신당의 22대 총선에서의 성공을 이끈 것, 687만명의 유권자의 지지를 끌어모은 것은 결국 '윤석열 검란의 희생자 조국'이라는 서사이다. 이 서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조국은 무고한 희생자여야 한다. 국민적 공분을 샀던 입시 비리 의혹에 관한 부분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려면 '강남 부자들의 관점'에서 조국 일가의 입시에 큰 문제는 없었는데 조국만 재수없게 당한 것이라는 판단을 수용해야 한다. 나는 강남 3구 등에서 조국혁신당의 (더불어민주연합에 비한 상대적) 득표율이 높았던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조국혁신당이 '조국의 정치적 신원을 위한 정당'인 이상, 그 지지의 근거가 되는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보적 가치'와 상충하는 '강남 부자들의 관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우려이다.

군수 재선거가 열리는 전남 영광군에서 선거운동을 펼치는 조국혁신당 지도부 (출처: 연합뉴스)

10월 16일 열릴 하반기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조국혁신당은 전남 영광군수와 곡성군수 재선거에 후보를 공천하며 민주당의 '호남 패권'에 도전한다. 언론에서는 이 선거 결과에 따라 야권의 대권 구도가 뒤흔들릴 수 있다는 식의 호들갑을 떨지만, 현실적으로 본인이 민주진보진영의 대표주자로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건 조국 대표 자신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혁신당이 이 선거에 총력을 다하는 이유는 서두에서 언급했던 '조국혁신당을 준비하는 과정'의 일환이리라 본다. 조직을 갖추고 인력풀을 확대해 조국 개인에 대한 지지세에 의존하지 않고도 돌아가는 당을 만들겠다는 것이리라.

조국 대표가 꿈꾸는 대로 '조국 없는 혁신당'이 자생력 있는 '진보정당'으로서 존속하려면 유권자가 지지할 근거가 되는 방향성이 있어야 하고, 지금 조국 대표와 혁신당 정치인 등의 행보와 메시지 하나하나가 현재로서는 백지 상태와 같은 '혁신당의 방향성'을 형성해나갈 것이다. 그 방향성이 '진보정당'이라고 불러줄 만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서 조국 일가와 박은정 남편의 '결백함'은 빠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