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https://alook.so/posts/1RtMvOe

요즘 민주당을 보다 보면 박지현의 이름 석 자가 떠오른다. 특별히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비대위원장 박지현이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다른 정치인들은 박지현과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소 두서없이 여러 이야기가 섞여 있는 듯해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시계를 잠시 돌려보자. 2022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왜 패했는가? 일단 윤석열 정부 허니문 선거니까 진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민주당 지지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다른 이름이 종종 튀어나온다. "박지현이 당을 쓸데없이 들쑤셔놔서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안 나와서 졌다!"는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여전히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박지현'이라는 이름은 '실패한 청년정치인'의 대명사처럼 잘근잘근 씹히곤 한다.

그런 식의 분석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당시 지지층 사이에서는 대선 석패와 윤석열 정부의 생각보다 낮은 취임 초 지지율 등으로 소위 '근자감'이 넘실거렸지만, 돌아보면 박지현이 가진 위기감과 절박함이 옳았다. 또한 당시 박지현이 했던, 문재인 정권에서 요직을 지낸 인사들의 책임 촉구나, 당내 성범죄에 대한 엄정 대응 등은 기본적으로 옳은 방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그녀의 '개혁'은 당내 격한 반발을 불러오고 실패했으며, 그녀를 지지층의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는가? 당내 기득권 세력의 저항? '지방대 출신 20대 여성'에 대한 혐오? 강성 팬덤의 폭력성? 모두 일정부분은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녀 자신에게 있었다. 그녀는 민주주의의 기본 명제를 가볍게 보았고, 그로 인해 실패했다.

이재명에겐 있고 박지현에겐 없었던 것

민주주의의 기본 명제란 무엇인가? 내가 최근에 쓰는 글마다 주구장창 강조한 헌법 제1조제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기본 명제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나와 달리 수많은 권력을 갖는 이유는 그가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도, 나보다 학벌이 좋아서도, 나보다 술을 잘 마셔서도 아니다. 2022년 3월 9일에 20대 대선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국민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나는 윤석열을 나의 대표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술은 제도적으로 부여되는 권한 뿐만 아니라 실질 권력에서도 동일하다. 가령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내일 갑자기 대표직을 내려놓는다면, 그 순간 그는 공식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초선의원이 될 뿐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재명 의원이 다른 초선의원들과 동등한 권력을 가질까? 그가 민주당원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유력 대권주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는 여전히 민주당 내의 최고 실권자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권력의 주인은 국가에서는 국민, 당에서는 당원이고, 그 당원들이 이재명에게 힘을 실어주니까 그만한 힘을 갖는 것이다.

대선 이후 윤호중-박지현 공동 비대위 체제에서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형식상 당대표에 준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없었다. 당시 박지현은 이제 막 정치판에 얼굴을 드러낸 정치 신인일 뿐이었고, 당원의 지지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대표직이 공석이 됐을 때 정치인들끼리 쑥덕쑥덕거려서 임의로 '비대위원장'을 앉히는 제도 자체가 비민주적인 측면이 있고, 이 때문에 대체로 비대위는 큼직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현상의 유지관리에 집중한다. 그들은 정식 당대표와 달리 당의 주인인 당원으로부터 대표성을 부여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정치사를 보면 굵직한 조치를 단행한 비대위도 많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비대위의 경우 박근혜는 형식적인 절차는 거치지 않았지만, 친이계의 실권(失權) 후 당내 사실상 유일한 대권주자로서 당원과 지지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기에 그만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다. 물론 대표성을 별로 획득한 적이 없으면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 김종인 비대위(들)의 사례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소위 '선거의 제왕'으로서 그가 쌓아온 명성이 "나를 따르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을 정치인과 지지층에게 줌으로써 그를 인정하게 하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박지현 비대위원장은 취임 당시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그녀가 현상의 단순 유지관리 이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당원에게 대표성, 즉 권력 위임장을 부여받으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했다. 박지현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자신에게 당헌당규상 주어진 권한만으로 강도높은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으나, 그게 틀렸다는 것만 증명하고 말았다. 만약 당시에 이재명이 직접 비대위원장이 되어서 박지현과 정확히 똑같은 행보를 했다면 지지층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메신저를 보지 말고 메시지를 보라'고 항변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비대위원장에서 물러난 후 박지현의 행보를 보면 솔직히 여전히 자신을 '당대표급의 인사'라고 생각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다소 무리수에 가까웠던 전당대회 출마를 시도했다가 좌절된 것부터 해서, 중앙정치 이슈에 불필요하게 말을 많이 얹은 것 등이 그랬다. 당원과 유권자의 선택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그녀가 해야 하는 건 일단 왜 제비뽑기로 뽑은 아무 20대 여성이 아니라 '박지현'에게 권력이 필요한지를 유권자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행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난 후 22대 총선 국면에서 박지현은 험지인 송파구 을 선거구 출마를 선언했고, 경선 기회까지는 얻었으나 별 이변 없이 낙천했다. 민주당 공천이 시끌시끌한 와중에 그녀는 군말 없이 결과에 승복하고 공천받은 송기호 후보에 대한 응원을 보냈다. 뒤늦게나마 '진짜 권력'의 주인인 당원과 유권자로부터 권력 위임장을 받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것은 바람직한 변화이다. 앞으로 '정치 신인' 박지현이 당원으로부터 인정받는 날이 오길 응원한다.

정치권력은 연공서열순이 아니다

나는 솔직히 처음에 박지현이 정치경력이 없는 신인이라 정치적 대표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최근의 정국을 보면서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언론도, 심지어 노회한 고위 정치인들도 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개혁신당-새로운미래의 합당과 결렬 과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당이 합쳤다 갈라지는 모양새가 영 좋지 않았으며 악수(惡手)였다고 생각하지만, 그와 별개로 당시에 "이준석이 이낙연한테 먹혔다"는 식의 반응이 나왔던 건 좀 당황스러웠다. 비록 이준석이 소위 '-3선 중진'이라며 조롱받고, 이낙연은 5선 국회의원에 전남지사, 국무총리, 민주당 대표까지 역임한 거물이라지만, 정치권력은 연공서열로 분배되지 않으며 그런 과거 이력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개혁신당과 새로운미래의 합당 전에도, 결렬 후에도 이준석 쪽이 이낙연 보다 더 많은 지지율을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갑인 쪽은 이준석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낙연이 알면서 '숙이고' 들어간 줄 알았는데, 얼마 못 가 도로 갈라진 걸 보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당의 주인인데 세입자한테 밀려나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했던 윤영찬 의원도 마찬가지다. (일단 무슨 DJ 때부터 궃은일을 도맡아 해온 원로도 아니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야 영입된 윤 의원이 대체 무슨 근거로 자기가 민주당 본류라고 주장하는지는 넘어가자.) 당의 주인은 이재명도 윤영찬도 아니고 당원이다. 민주당 의원들의 대표성은 연공서열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당원들의 판단에 따라 부여되거나 회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이재명 대표가 당원들이 위임장을 다시 써줄지 여부를 직접 결정할 기회를 별로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겠다.

정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있나?

그러나 국민의 지지로부터 오는 진정한 '실권'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당원과 유권자의 지지에 기반할 때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는 지도부 및 정치인들과의 개인적 친소관계와 같은 요소가 실권의 크기를 결정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전제는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고 있다.

가령 지금은 얼추 봉합되었지만, 2월 말 친문계 고민정 최고위원이 공천에 대한 반발로 당무를 거부하자 친명계 정성호 의원이 차라리 그만두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가 충돌이 격화된 일이 있었다. 최고위원이 일반적으로 형식상 권한에 비해 실권이 크지 않은 자리로 여겨지는 하지만 고 최고위원은 엄연히 전당대회에서 일군의 당원으로부터 직접 대표성을 부여받은 인물인 반면, 정 의원은 이재명 대표와의 개인적 친소관계 외에는 공식적으로 맡고 있는 당직도 없고, 지역구 밖의 당원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든가 하는 바도 그닥 없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공천에서 누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후자를 고를 것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의 아들 문석균 예비후보(의정부 갑)나,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동생 정희균 예비후보(완주·진안·무주)가 재심 끝에 경선 기회를 받은 것도 문제가 있는 사례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들은 모두 경선에서 떨어졌다.) 물론 원칙적으로 모두가 공정한 경선 기회를 받아야 한다고 내가 주장한 바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잣대는 이때까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서 많은 이들에게 적용되지 않았으나 왜 저들에게만 관대한가? 2020년 총선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한 데다 지역조직이 공천을 받은 오영환 후보에게 협조하지 않아 당을 골치아프게 했던 문석균 예비후보가 경선 기회조차 받지 못하고 컷오프된 수많은 후보들보다 나은 점은 부친이 당의 원로라는 점 단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공식 당직도 국민의 지지도 아닌 저런 사사로운 요인이 당무에 너무 많이 개입된다. 정치인들은 다수 대중은 바보 취급하면서 자신의 사사로운 인연이 중심이 된 이너서클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이 여론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방향을 설정하곤 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기성 정치인들이 박지현보다 특별히 낫다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언제쯤이면 정치인들의 판단 기준이 주권자 국민이 될까.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