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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24년 4월 10일 지구는 멸망한다?
'데모크라시 시리즈'라는 유명한 정치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각종 정책을 선택해 유권자의 지지도를 얻어 선거에서 재선하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다. 한때 이 게임을 즐겨했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기억 중에 하나는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이 나오지 않자 소득세 폐지(!)를 포함한 각종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했는데 그게 먹혀서 덜컥 재선돼버린 일이었다. (물론 2기 임기에서는 그 뒷수습을 하느라 애를 먹다가 지지율이 떨어져 암살당하는 결말을 맞았다.) 이 게임에서야 플레이어가 재선하지 못하면 그 세이브파일은 그대로 끝나기 때문에 뒷일은 뒤에 생각하고 이런 식으로 뭐라도 해서 무조건 재선을 노리는 건 '합리적'인 전략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2024년 4월 10일 이후로도 삶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이번에는 국회의원 수를 250명으로 감축하겠다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이게 어째서 말도 안 되는 1차원적 포퓰리즘인지는 조금만 찾아보면 다른 분들의 친절한 설명을 볼 수 있으므로굳이 이 글에서 다시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겠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포인트는 이것이 옳지 않은 건 물론이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뭐 어떻게든 총선에서 단독 과반을 먹었다고 치자. 의석 수를 줄이면 국민의힘 의원들의 '밥그릇'은 안 줄어드는가? 당장 이번 총선을 앞두고 강원도에서 6개 시군을 묶은 공룡 선거구가 생길 가능성이 제시되며 지역사회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석 수 감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받을 인구 희박 지역들은 대부분 국민의힘 의원 지역구인데 이들이 가만히 넘어갈 리가 없다. 정치 신인인 한동훈 위원장은 그렇다 치고 그 밑의 실무진들이 이를 모를 리는 없다. 그저 뒷일이야 어찌 되든 일단 이 1차원적 포퓰리즘이 먹혀서 지지율이 올라가면 성공이라는 마인드다. 이들의 머릿속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데모크라시 시리즈'처럼, 2024년 4월 10일 총선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지구가 멸망하니까 일단 지구를 살려놓은 후에 공약을 지키건 말건 고민해야 하는 모양이다.
II. 일단 던져보고 싫음 말고
취임 초반으로 돌아가보면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만5세로 하향하겠다는 기사(22.07.30.)가 나온 적이 있었다. 충분한 내부 검토를 거쳐서 꺼낸 의제인지 심히 의문이다. 예상대로 반응이 안 좋으니 1주일여 만에 박순애 당시 사회부총리가 사퇴(22.08.08.)하는 것으로 끝났었다.
이듬해 들어 이런 식의 행태는 더 자주 반복된다. 6월에는 밑도끝도없이 '킬러 문항'을 문제삼으며 수능 출제에 개입했으나 정작 문제의 핵심은 놔두고 엉뚱한 지점에 천착했으며, 그 해 수능에서도 수험생들은 긍정적인 변화를 체감하지 못했고, 유일한 만점자는 '사교육 카르텔'의 정점이라 할 만한 모 재수학원에서 나왔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로는 의대 증원을 꺼내들었다. 필요한 일이지만 증원 규모에 대해서도 방법론에 대해서도 나오는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인 등 내부적으로 충분한 검토와 로드맵이 있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아니나다를까 후술할 메가서울로 담론 중심축이 옮겨가자 이 논의는 바로 관심에서 밀려났다.
그 다음은 김기현 당시 국민의힘 대표가 김포시 서울 편입을 위시한 소위 '메가 서울'을 총선 승부수랍시고 들고 나왔다. 같은 당 지자체장들로부터도 비판이 제기되듯이 지역균형발전에 역행할 뿐만 아니라 유권자가 '서울시민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달콤한 유혹이면 윤석열 정부의 각종 실정을 싹 잊어버리고 변심할 거라는, 마치 먹이를 주면 몰려오는 금붕어 정도로 취급하는 행태다. 심지어 이조차도 총선이 다가오자 흐지부지되는 모양새다.
한동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아직 크게 화제가 되진 않았지만 한동훈 법무부의 역점 사업 중 하나였던 '한국형 제시카법'도 이런 맥락이다. 성범죄에 대한 공분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어찌됐건 법원이 내린 형을 다 살고 나온 범죄자에 대해서 또다시 거주지 제한을 걸겠다는 건 사실상 이중 처벌로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다. 나는 이 법이 헌법재판소에 가면 위헌 결정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검사 출신 한동훈 당시 장관이 나보다 법을 잘 모를 리는 없다. 알면서도 일단 여론의 지지가 있으니까 민주당도 반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그럼 당장 자기 치적을 남길 수 있으니까 추진해온 것이다. 나중에 헌재에서 위헌 결정을 받든 말든 자기 알 바는 아니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매력적으로 보이는 의제를 무작정 던져서 지지율을 끌어오려 시도하고, 반응이 별로면 금방 또 흐지부지된다. 한동훈 위원장이 최근 각종 포퓰리즘성 '정치 개혁' 의제를 총선 승부수랍시고 내놓는 것도 결국 이러한 움직임의 연장선상이다. 이게 필요한 의제인지, 현실성이 있는 의제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추진해나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은 전무하다. 당장 표를 조금이라도 끌어올 수 있으면 그만이다.
III. '국민 개돼지론'
이런 식의 '던지고 보는' 정치를 하는 이유는 역량 부족도 있을 것이고, 민주당을 '무찔러야 할 적'으로 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든 이기지 못하면 나라가 크게 잘못되리라는 불안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유권자의 수준을 낮잡아 보기 때문에 저런 게 통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을 잃은 가장 큰 원인은 부동산 정책의 실패였다.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해 '종부세를 내는 부자들의 이기적 계급투표 때문에 졌다'는 피해의식이 만연해 있는 느낌이다. 물론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쓰고자 한다.) 문제는 국민의힘도 비슷하게 '민주당은 국민의 욕망을 무시해서 졌다', 즉 '국민의힘은 국민의 욕망에 복무하면 이긴다'는 식의 단순한 도식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유권자가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통념과 달리 항상 이기적이고 단순한 선택을 하는 것 역시 아니다. 한동훈 위원장이 속이 빤히 보이는 1차원적이고 근시안적인 포퓰리즘을 쏟아냄으로써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기존 여권의 계산을 답습하고 있다면 총선에도, 나아가 그의 대권가도에도 가시밭길만이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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