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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제3지대'라는 환상

라인란트 2023. 12. 20. 20:50

https://alook.so/posts/Vnteo2M

 

I. 정당의 핵심은 이념

  요즘 여기저기서 '제3지대'를 내세운 신당 창당 움직임이 활발하다. 금태섭 의원을 위시한 '새로운선택'이 가장 먼저 움직였으며, 보수 진영에서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가장 앞서나가고 있고, 민주당 측에선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신당 창당을 기정사실화하고 움직이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연대 내지 통합 가능성도 제기된다. 으레 제3지대론이 제기될 때마다 따라나오던, '합리적 진보와 개혁적 보수가 함께할 수 있는' 빅 텐트를 만들겠다는 이야기가 기치로 내걸린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선택이든 이준석 신당이든 이낙연 신당이든 간에 제3지대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은 점은 그래서 자신들이 권력을 잡으면 무엇을 하겠냐는 것이다.

  정당은 공통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모인 이들의 집단이다. 많은 유권자는 자기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치적 목표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정치적 목표와 부합하는 정치적 목표를 가진 정당에 투표한다. 예를 들면 규제 완화와 감세를 통한 자유로운 기업 활동의 장려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로 생각하는 유권자는 자신과 입장이 합치하는 국민의힘에 투표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러한 공통된 정치적 목표, 다르게 말해 '이념'이야말로 정당이 유권자에게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물론 명확한 정치적 목표에 따라 지지 정당을 결정하는 유권자도 있지만,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각 정당에 대한 신임과 불신임을 결정하는 유권자도 있다. 하지만 이들도 결국에는 정당이 내세우는 정치적 목표, 즉 이념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 정당을 선택한다. 예를 들어 국민의힘 정부가 위에서 언급한 친기업 정책을 펼쳤는데, 그 결과가 안 좋았다고 평가하는 유권자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유권자는 그 대안으로 (상대적으로) 친노동 정책을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을 선택하는 것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경제적 이념이 국민의힘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완벽히 일치한다면? 국민의힘의 경제정책을 심판하기 위해 민주당을 찍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어차피 똑같은 정책을 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별다른 이념을 갖지 않는 중도층도, 각 정당이 명확한 이념을 선택 기준으로 제시해줘야 A정당을 심판하기 위해 B정당을 찍는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위에서 국민의힘=친기업 / 민주당=친노동이라는 도식을 세워 놓은 걸 보면서 '민주당도 똑같은 친기업 정당 아니냐?'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여러분처럼 양당제 하에서 양당 모두 자기 이념을 대변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유권자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며, 다당제를 지지/옹호하는 논리는 대부분 거기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제3당 역시 그 존재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대변하는 이념과, 대변하는 유권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II.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정치

  문제는 제3지대의 깃발을 든는 이들 상당수가 정반대로 '이념을 탈피하겠다'라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중간의 뚜렷한 이념이 없는 유권자가 물론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정당을 평가하기 위한 '선택 기준'은 필요하다. '탈이념'을 하겠다는 말은 유권자에게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아무튼 둘 다 싫으니까 우리를 찍어달라'는 1차원적 정치 혐오에 호소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마 당사자들은 우리가 양극단의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거지 '중도적인' 주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항변할 것이다. '(양당과 달리) 협치를 하겠다', '(양당과 달리) 민생을 챙기겠다', '(양당과 달리) 도덕적인 정치를 하겠다' 등이 따라나온다. 좋은 말이지만 이 말들은 '정치를 잘 하겠다'는 말과 아무런 정보값 차이가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말들의 주어가 제3지대 정치인이 아니라 민주당 정치인이어도 국민의힘 정치인이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그렇다면 유권자는 이 '아무 주장도 하지 않는 정당'을 선택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단기적으로 정치 혐오 정서에 기대서 돌풍을 일으킬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정치 혐오에만 기대는 자생력이 없는 정당은 지속 불가능하다.

  단순히 '양당 다 나쁘다'라는 말은 5살짜리 아이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정당으로서 권력 획득을 추구한다면 그 권력으로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정쟁 대신 민생을 챙기겠다'고 한다면 자기가 생각하는 '정쟁'과 '민생'이 뭔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예컨대 노란봉투법은 철지난 좌파 이념에 매몰된 정쟁용 법안인가, 아니면 노동자의 권리 신장을 위한 민생 법안인가?

III. 분당의 진짜 이유와 명분

  제3지대 세력이 이렇게 모호한, 하나마나한 주장만 하는 건 소위 양당의 '주류'와 '비주류'간의 갈등이 사실 '이념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이낙연 전 대표가 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근거로 든 것은 '당의 도덕성 상실과 강성 지지층의 비주류 공격, 이재명 사당화' 등이었고, 최근에는 (신당 창당 중단의 이유가 될) 민주당의 '획기적 변화'의 예로 '통합 비대위 수용 여부'를 들었다. 각 논거의 타당성은 본론과 상관없으므로 여기서 논하지 않겠으나, 중요한 점은 이낙연이 민주당 주류와 뭔가 이념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 '다른 이념'을 반영하기 위해 당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이재명 지도부의 2선 후퇴 여부에 따라 분당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재명의 잘못인지, 이낙연의 잘못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으나, 중요한 건 이낙연 신당의 실질적 창당 이유는 '이재명 지도부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이다. 그럼 어떤 이유로든 창당의 근거였던 이재명 지도부가 사라진다고 하면 이낙연 신당은 그 순간 존재 의의가 없는 정당이 된다.

  사실상 현재의 제3지대 운동 상당수는 원소속당의 주류 교체를 원하는 당내 권력투쟁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중도'네 '탈이념'이네를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가깝고 유권자로 하여금 '내가 잘못했는지 주류가 잘못했는지 가려달라!'를 직접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가령 이준석 전 대표의 경우 실제로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대표직에서 사실상 축출되었던 만큼 상대적으로 명분이 축적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이를 유권자에게 투표해달라고 호소하는 근거로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낙연 전 대표 및 비명계의 경우 이들이 민주당에서 이 정도 수준의 구체적인 '탄압'을 당했다고 볼 수 있는지 심히 의문스럽다. 이들이 이재명 지도부 퇴진 요구의 근거로 드는 것은 대부분 '연임설', '비명계 공천학살설' 등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추상적인 '가능성'에 근거하고, 현재까지 '실제로' 당한 것은 '개딸'로 일컬어지는 극성 지지층에게 문자폭탄 등 사적제재를 당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민주당과 구분되는 독자적 이념도 없고, '이낙연 신당을 찍어서 민주당 주류를 심판해달라'라고 (범)진보층에게 호소할 명분도 뚜렷하지 않다. 명분이 없으니 기존 민주당 지지층은 호응하지 않고, 독자적 이념이 없으니 기존 민주당이 대변하지 못하던 새 지지층을 끌어올 수도 없다. 이런 이념도 명분도 없는 급조 정당은 성공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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