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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민주화 세력'과 역사의 아이러니
영화 <서울의 봄>은 비수기에 개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 이상의 대흥행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악행도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서울의 봄>을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목적을 가진 진보 편향 영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지만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오늘날 '반독재'가 곧 '민주-진보'의 정체성으로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러한 '개발독재의 후예 국민의힘'과 '민주화 세력의 후예 더불어민주당'의 '역사 전쟁'이 미래지향적인 정치적 경쟁을 방해한다는 주장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민주당 계열이 '반독재 정당'으로서 정체성을 명확히 한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잠깐 역사의 아이러니를 하나 보고 가자.
영화 <서울의 봄>에서 임철형이 분한 '강 실장'의 실제 모델은 12.12 당시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직무대리였던 정동호 준장이다. 그는 이후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하며, 전역 후에는 민주정의당-자유당에서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낸다. 여기까지는 뭐 평범한데 좀 뜨악할 만한 경력이 하나 있다.
그는 1993년 14대 국회 당시 국회의원 재산공개 파동의 여파로 민주자유당에서 쫓겨난 후 15대 총선에 불출마하며 사실상 정계 은퇴 상태였다가, 느닷없이 국민의 정부 시기였던 2000년, DJ 휘하의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원 지역구 의령·함안에 출마한다. (물론 낙선한다.) 12.12 쿠데타의 주요 가담자 중 하나가 민주화 세력의 후예를 자처하는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나선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하지만 당시에 정동호는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사례가 아니었다. 하나회 멤버는 아니었지만 12.12. 이후 각종 정치공작을 주도했고 민주정의당 창당의 핵심이었던 권정달도 이 선거구에서 기호 2번으로 경북 안동에 출마했으며, 좀 더 넓게 보자면 DJ의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던 DJP연합부터가 유신 잔당과의 협조인 셈이었다.
II.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민주당
내가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데는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그냥 우리 고향 팀이고 이기면 내 기분이 좋으니까 응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 내가 더불어민주당의 선거 승리를 바라는 데는 단순히 내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실현하려는 목적 내지는 가치, 다른 말로 '이념'이 있기 마련이다. 그 측면에서 민주당이 지향하는 이념은 사실 모호하다. 흔히 '진보'로 퉁 치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민주당이 스스로를 '진보'라고 지칭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국민의힘이 극우인 거고 우리가 진짜 보수 정당이다"라는 말을 민주당원이 하는 것도 흔히 봤다. 각종 정책 의제에 대한 의원들의, 나아가 당원들의 태도 역시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가 딱 하나 존재한다면, 역시 군사독재에 맞섰던 민주화 세력의 후신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점일 것이다.
'민주화 세력'으로서 더불어민주당의 정체성을 찾는 데 있어서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중요성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대중은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바친 위대한 거인이며, 박정희-전두환 시절 민주 진영의 두 거두였던 양김 중 김영삼이 보수정당과 결탁한 이상 실질적으로 민주당의 유일한 중시조라고 볼 수 있고, 또한 민주화 이후 민주당이 배출한 첫 대통령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대중은 어쩔 수 없는 '20세기 정치인'으로서의 한계 역시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전근대적 총재 제도를 통해 당을 주물렀으며, 상술했듯이 본인이 평생을 반독재를 위해 바친 민주투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 세력의 잔당과 필요에 따른 합종연횡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DJ의 입장에서는 3당 합당으로 인해 고립된 진보와 호남이 양당제의 한 축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20세기형 구태정치' 없이도 민주당이 양당제의 한 축으로서,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를 넘어선 '반독재'의 정체성에 기반해 지속성을 갖게 한 공은 또 다른 거인, 노무현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참여정부는 임기 내내 각종 난맥상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고 결국 정권 재창출에도 실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민주당이 노무현을 김대중과 같은 반열의 거인으로서 존경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감정적 동정 때문이 아니라, '21세기 정당' 민주당을 정립한 것이 실질적으로 노무현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시대의 열린우리당은 비로소 여러 측면에서 현대적 정당으로서의 첫 발을 뗐으며, 지역주의 동맹을 넘어서 호남 밖에서도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제시했고, 균형발전을 비롯해 오늘날 민주당이 중요하게 여기는 각종 정책 아젠다 역시 노무현 시대에 처음 제시되었다. '민주화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시초가 김대중이라면, 그것을 완성한 것은 노무현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흔히 민주당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거론하는 '김대중 정신, 노무현 정신' 등의 의미는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III.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 승리
으레 보수는 능력, 진보는 도덕성을 무기로 삼는다는 인식이 있다. (개인적으로 둘 다 틀렸다고 본다.) 민주당이 민주화 세력이 가진 강력한 정치적 명분으로부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왔다면, 그 반대편에서도 경제적 우파와 사회적 보수주의보다는, 개발독재 시기의 고도성장에 대한 향수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해왔다. 대표적으로 정치인 박근혜는 그러한 향수의 화신(化身)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경제민주화'를 전면에 내거는 등 상당부분 좌클릭했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는데, 이것은 정치인 박근혜의 지지 기반이 어떤 보수우파적인 정책적 지향에서 오는 게 아니라 '박정희의 딸'이라는 상징성에서 비롯하는 것이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근혜 탄핵에서 어떤 거창한 헌정사적 의미를 찾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단 한 가지만 찾자면 바로 박근혜를 정치적 마스코트로 내세운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가 박근혜와 친박의 정치적 퇴장과 함께 그 동력을 잃었다는 점이라고 본다. 다르게 말하자면, 박근혜의 몰락은 곧 역사 전쟁에 있어서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를 내세운 보수 세력의 패배를 강하게 암시했다. (물론 광화문 광장에 나간 사람들이 박근혜가 박정희의 딸이라서 그녀를 몰아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사 전쟁이라는 전장에서 민주당은 승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보수가 매년 5월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 시비를 걸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윤석열 정부의 5.18 기념식에서도 아무 문제 없이 제창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는 정치인은 순 극우꼴통 취급을 받을 것이다. 좀 더 전으로 거슬러가면 대선 당시 윤석열 당시 후보는 김대중/노무현을 연일 띄우며 그들을 본받겠다고 말했는데, 물론 민주당 지지자 입장에서 상당히 불쾌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미 국민의힘도 거스를 수 없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에 들어갔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서울의 봄>의 대흥행과, 대조적으로 죽어서 묻힐 곳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전두환의 비참한 최후는 역사 전쟁의 승자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 물론 아직 할 일이 많고 자잘한 백래시도 계속되겠지만, 국민의힘 역시 선거에서 이기고 지고와 무관하게 이 큰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IV. 무엇으로 표를 달라고 할 것인가?
역사 전쟁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건 민주당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역사 전쟁에서 민주화 세력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면, 이는 더 이상 그것을 명분으로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내년 총선에서 "일본으로부터 광복하게 위해 OO당을 찍어주십시오!"라고 하면 꼴이 우습지 않겠는가?) 곧 민주당에게는 당원과 지지자를 묶어내고, 국민에게 민주당을 찍어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다른 명분이 필요해질 것이다. 사실 지금 당장은 야당이기 때문에 총선에서 의석을 늘리려면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론만으로도 충분할 지 모른다. 하지만 집권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재명 대표가 <서울의 봄>이 흥행하는 걸 보면서 독재 세력의 악행이 재조명되고 있으므로 이것이 민주당의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마음을 고쳐먹어야 한다. <서울의 봄>의 흥행은 이제 한국에서 군사독재가 나쁘다는 것이 마치 '독도는 우리 땅'처럼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당연한 것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민주당은 더 이상 군사독재에 대한 심판을 근거로 표를 달라고 할 수 없다. 지지층 일반이 공유하는 '반권위주의'를, 이제 역사 전쟁 이후에 맞는 '진보'적 가치로 재정립하는 것이 앞으로 민주당에 남겨진 숙제라고 생각한다. 이제 민주당은 '독재에 맞선 민주화 세력의 후신'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에 맞는 정책적 지향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정치인 이준석의 정치적 견해 대부분에 동의하지 않지만, '역사 전쟁 이후'를 내다보고 가장 기민하게 움직인 것은 역시 이준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준석의 국민의힘은 철 지난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 역시 '공정'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능력지상주의를 새로운 의제로 내걸어 문재인 정부에 불만이 많았던 20대 남성을 중심으로 호소력을 얻었다. 물론 반복하다시피 나는 거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나, 아무튼 '권력을 쥐어주면 뭘 하겠다는 것인지'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 국민의 판단을 받고자 한 것은 분명하다.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은 한 발 늦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얘기가 옆으로 너무 샐 것 같으므로 나중에 다른 글로 쓰려고 한다.)
이준석과의 깔끔하지 못한 '이별' 이후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다시 개발독재에 대한 향수와 북풍을 내세우던 전통적 문법으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더 이상 국민은 이런 것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힘이 헤매고 있다는 건 민주당으로서는 시간을 벌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재 민주당의 모습은 정부여당의 실책으로 인한 반사이익을 얻는 데 만족하고 있는 감이 있어 다소 걱정스럽다.
현재 민주당의 얼굴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재명일 것이고, 많은 이들이 차기 민주당의 대권주자로서 이재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내게는 '이재명 정부의 민주당'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아직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성남시장-경기도지사 시절 이재명을 전국구 스타 정치인으로 만들어준 건 기본소득 등으로 대표되는 명확한 경제적 좌파 정책이었다. 그런데 대권후보급이 된 후에는 이재명이 이런 의제를 강력하게 거론하는 것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재명 본인의 큰 결점으로 여겨지는 거친 급진파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정치적 판단의 결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선명성이 이재명을 이 자리까지 올려준 것임을 잊고 있는 듯하다. 이재명이 제4기 민주정부의 대통령이 되기를 꿈꾼다면, 김대중-노무현이 역사적 승리를 거둔 이후, 새로운 시대에 '이재명의 민주당'이 전면에 내걸고 국민에게 호소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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