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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의 보완재로서 진보정당의 가치
  • 외부 권위를 빌려오는 '지름길'의 한계
  • '기후 총선'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는 이유
해당 주장을 조금 보충하자면,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옹호자들 사이에서는 '비례대표 득표율에 가깝게 의석이 배분되어야 민심과 가깝다'는 것이 당연한 진리로 통용되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현재 다수의 여론조사에서 조국혁신당은 더불어민주연합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은 비례대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들이 이재명의 민주당 대신 조국혁신당으로의 제1야당 교체를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민의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럴 리가. 이들은 조국혁신당이 제한된 숫자의 비례대표 의석만을 획득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전제 하에서 조국혁신당의 영향력 확대를 통해 민주당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싶어하는 것일 뿐이다.

정의당이 그동안 얻어왔던 비례대표 지지율도 마찬가지이다. 잘 나갈 때 정의당 지지율은 10%에 육박했지만, 이들이 정의당이 30석을 얻기를 바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정의당에 비례대표 투표를 던진 유권자들 대부분은 현실적으로 정의당이 의미있는 의석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그 범위 안에서 정의당이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즉 양당제가 공고화된 한국 정치에서 유권자들이 소수 정당에게 기대하는 것은 2004년 열린우리당 같은 특수 케이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거대 양당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정의당에 표를 던질 만한 사람 대부분은 정의당이 여야 사이의 캐스팅보트를 쥔다거나 혹은 민주당을 대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민주당 왼쪽에서 민주당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을 커버하고 민주당을 왼쪽으로 견인하는' 정도를 기대하는 사람들이고, 녹색정의당이 끌어와야 하는 사람들도 이들이다.

여전히 국회에 진보정당은 필요하다

위의 맥락에서 정의당은 '민주당을 보완하는 선명 야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게 1편에서 썼던 내 생각이었다. 당시에는 (녹색)정의당이 비례대표 득표율 3%를 못 넘겨 22대 국회에서 원외정당으로 전락하기를 내심 바랬는데 지금은 그 정도 적개심은 좀 누그러뜨렸다. 정의당이 사실상 범여권처럼 굴었다고 해도 일단 민주당은 커버하지 못하고 정의당이 커버하는 영역이 존재하긴 했다. 그 영역을 민주당이 대신 커버하고 있다면야 존재 가치가 사라진 '범여권' 정의당은 사라지는 게 옳은 일이다. 과연 그러고 있는가?

얼마 전 더불어민주연합은 비례대표 국민후보로 '선출'된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병역비리'라는 어처구니없는 핑계로 컷오프했다. 내부적으로는 역시나 그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는 보도가 많다. 오늘은 비동의 간음죄(* 개인적으로 'yes means yes' 식은 부작용의 여지가 크다는 데 동의하지만 'no means no' 정도는 필요하다고 본다.)가 민주당 정책공약에 포함되었다는 보도에 대해 민주당이 '실수'라는 입장을 냈다.  그 밖에 각종 노동쟁의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자리에서 민주당이 간만 보는 동안 그들의 곁에는 진보정당들만이 있어줬던 경우가 여전히 많았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번 총선의 녹색정의당 비례대표 상위권 명부에는 노동운동에 오랜 세월 투신해온 분들이 자리잡았다. 특히 4번을 받은 권영국 변호사는 내가 예전부터 언제 한번 국회에서 볼 수 있길 바랬던 분인데, 당이 정말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야 이런 분들이 기회를 받는다는 게 씁쓸하다. 내가 '범여권'으로서 굴었던 정의당이 심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거대 양당이 나를 외면하고 정의당만이 내 곁에 있어줬다고 느끼는 노동자와 소수자들에게 내가 녹색정의당을 찍지 말라고 요구할 명분은 없다.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

그러나 내 생각이 그렇건 말건 녹색정의당을 22대 국회에서 볼 수 있을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 지난주 한국갤럽 자체 여론조사(3.19.-21.)에서 녹색정의당에 비례대표 투표를 하겠다는 응답자는 1%에 그쳤으며, 유일한 현역 지역구 의원인 심상정 의원은 생환은 고사하고 선거비 전액보전(15%)조차 위태로운 상황이다.(경인일보-KSOI 3.23.-24.) 사람들이 이제는 저런 '진보적 가치'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사회가 전체적으로 보수화된 것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 녹색정의당의 문제가 무엇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 마포구 을에 출마한 녹색정의당 장혜영 후보가 뜬금없이 민주당 정청래 후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나는 처음에 헤드라인만 보고 정청래가 뭔가 큰 사고라도 쳤나 해서 조마조마하면서 열어봤는데 그 내용을 보고 어이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장(혜영) 예비후보는 먼저, "정청래 예비후보는 참여연대,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민언련 등 80여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2024 총선시민네트워크(이하 '총선넷')'의 낙천 대상"이라며 "'총선넷'은 그 선정 기준으로 '부자감세 등을 통해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민생을 외면하는 정책을 펼친 후보자'라고 공식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회견만 한 게 아니라 아예 지역에 녹색정의당 명의로 정청래 사퇴를 촉구하는 현수막도 여기저기 건 것으로 들었다. 저 기자회견과 현수막들이 녹색정의당과 장혜영 후보가 표를 얻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근거가 대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하다. 저걸 보고 "총선넷에서 정청래를 낙천 대상으로 지정한 걸 보니 정청래는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따라서 대신 장혜영을 찍어야지!"라고 생각할 유권자가 대체 몇 명이나 될까? 당연하게도 저 기자회견 후의 여론조사에서도 정청래 후보는 오차범위 밖에서 넉넉히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장혜영 후보는 10%도 넘지 못하고 있다.(뉴스1-갤럽 3.24-25.)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2024 총선시민네트워크'의 존재를 이 기사로 처음 알았다. 네가 시민사회에 관심도 없으면서 무슨 정의당 욕을 하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으나 마포구 을 유권자 대다수도 아마 그럴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생전 처음 듣는 단체에서 우리 동네 의원을 낙천 대상으로 지정했으니까 아무튼 따라야 한다니 대다수 유권자에게 저 기자회견은 황당하게만 들렸을 것이다. 물론 '총선넷'이라는 단체는 생소하다고 해도 저기 참여한 단체들 각각은 시민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단체들이고, 그들 나름대로는 합당한 이유를 갖고 정청래를 낙천대상으로 지정했을 것이며, 장혜영도 그것이 합당하고 당연하다는 데 동의해서 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자기들끼리의 '당연한 사실'을 유권자가 공유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어떤 의제를 주장하면서 선진국이 시행한다거나 국제기구가 권장한다거나 이런 식의 외부의 권위를 빌어와서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당연한 것'으로 포장하는 논증은 너무 많았다. 가령 나는 동성결혼 법제화를 지지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도 하는 세계 트렌드다'를 가져오는 건 문제가 있다. 그런 식이면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민간인 총기소지가 합법이니까 우리도 그래야 하는가? 당장은 복잡한 설명과 논쟁을 생략하고 간편하게 설득이 가능한 치트키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 결함이 있을 뿐더러 이런 식으로 찍어누르는 논증은 필연적으로 더 큰 반동을 불러온다. 위의 촌극은 그 권위를 빌려오는 주체로 '(장혜영 본인은 그만큼의 권위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단체'를 쓰는 바람에 벌어진 것이다.

'기후 총선'의 전제조건

녹색정의당이 '민주당을 견인하는 왼쪽 블럭'으로서의 포지션을 버렸다고 해도 녹색정의당이 내세우는 독자적 의제가 유권자에게 호감을 얻는다면 살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그 지점에서 녹색정의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세우는 핵심 아이덴티티는 '기후'이다. 기후위기는 우리 미래세대, 아니 우리 세대에게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의제임이 분명하다. 진보 언론들의 보도를 보면 이 중요한 기후위기 문제가 총선의 쟁점으로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강하게 묻어난다. 어쩌면 녹색정의당의 저조한 지지율을 보면서 이들은 '유권자가 이렇게나 기후위기에 관심이 없다고?' 하며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문제는 아니다.

'기후변화는 중요한 문제인가?' 설문조사해보면 아마 찬성 한 80%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녹색정의당 지지율이 80% 나오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어떤 의제에 대한 막연한 동의가 구체적인 정치적 선택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정책의 형태로 구체화되어야 하고, 유권자가 그것이 자신의 삶과 직접 연관된 문제라고 느껴야 한다. 그리고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건 생각보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예컨대 '일회용품 사용과 탄소배출을 줄이자!'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지난 정부 당시 공중업소에 대한 다소 강도 높은 일회용품 규제를 시행하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던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기후위기 대응이 실제로 유권자의 표심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우리 삶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며 또한 그 과정에서 겪어야 할 불편에도 감수하고 관련 정책이 우리 삶을 개선해줄 것임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 녹색정의당 내부적으로는 물론 구체적인 비전과 정책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필요성을 유권자에게 설득하기 위해 내는 메시지는 너무 단순하고 얄팍하다. 위의 정청래 사퇴 요구 사건과 유사하게, 여야가 싸우는 다른 모든 의제보다 '기후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걸 당연한 진리로 깔아놓고 그 위에서 논리를 전개한다. 아마 녹색정의당 및 그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 진보 언론의 입장에서 기후변화가 우리 삶에 얼마나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이야기일 테고, 이것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이야기는 뜬구름잡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최근 '875원 대파 논란'으로 불거진 '대파 챌린지'로 대표되듯 결국 지금 정권 심판론을 재점화한 건 민생 문제이다. '기후 총선'을 향한 녹색정의당의 외침이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있는 것은 유권자가 그것을 민생 문제라고 진정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제 와서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21대 국회에서 정의당의 행보가 그동안 계속 '선명한 민주당을 원하는 유권자'의 기대를 저버려왔으며, 그렇다고 기후를 비롯한 독자적인 의제를 대중에게 설득하는 데도 실패했기에,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상황을 이렇게까지 악화시킨 21대 국회의 정의당 정치인들을 어차피 전부 22대 국회에서 볼 수 없을 예정이기에, 나는 녹색정의당의 22대 국회 비례대표 후보들에 대한 악감정은 전혀 없으며 녹색정의당이 그래도 3%는 넘기를 내심 어느 정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설령 정의당이 살아남더라도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는지에 대해 '조국사태 때 민주당 편들어서'만 5년째 우려먹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 본문에 인용된 여론조사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심위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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